Friday, April 21, 2017
내 자리
찌뿌둥합니다.
오늘 아침에 비가 오기도 했고, 한국에 다녀온 여파이기도 한 듯 하고요... 제가 이 곳에서 억척같이 살아가면서 모국에 많은 제 지인들을 잊고 지냈구나 싶기도 하네요.
돌아오니 반겨주는 아이 친구 엄마들도 있고, 담임 선생님들은 저를 이런 저런 이유로 찾습니다. 제가 아이 소풍 준비도 해줘야 하고, 학년말파티 준비위원이기도 해요. 이젠 선생님께 먼저 이메일들이 오네요. 한국식으로 하면, "어머니, 이 것 좀 도와주세요."하고 말이죠.
한국에 있는 내내 알러지를 달고 다니고, 먼지 때문인지 눈이 뻑뻑하고 충혈이 되어있었는데 돌아오니 그런 증상들은 말끔히 사라졌네요. 지금 제 집은 이 곳이겠죠? 제 마음 속의 고향은 한국이고요...
하지만 제가 남편에게도 엊그제 말 했듯이, 한국에서는 좀 느슨하게 지낼 수 있어 좋았어요. 이 곳에서는 실수 없이 하려고 (뭔가 잘 못 진행되면 내 손해가 너무 커서) 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고, 관공서 하나를 가도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야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가죠. 반면, 한국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 그런지 약간 넋놓고 가도 다 알아서 챙겨주더라고요... 어느 정도 제가 그 시스템을 알아서 그럴까요? 아니면 저도 한국에서는 방문객이었기 때문에 좀 스스로 느슨해진걸까요? 이것 저것 살살 물어보며 할 수 있어 너무 좋았던 것 같네요.
아이들은 참 감사하게도 성실하게 학교 생활 너무 잘 해주고 있고 교우관계도 좋아요. 이젠 아이들 주변에서 적당히 챙겨주며 (빠질땐 빠지고) 엄마가 필요할 때는 힘이 되어주는 정도만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2017-2018에는 저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다시 일을 해야겠죠...
Wednesday, April 19, 2017
갑작스런 한국 방문
아이 학교 이야기, 여행 다녀온 이야기 등 달콤한 이야기들만 이 곳에 풀어놓았었는데, 이번에는 최근 제 한국방문기를 풀어놓을까 합니다.
저는 어릴 적 네살까지 외할머니께서 키워주셨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부모님을 뵈었다고는 하지만 제 머릿 속에 남아있는 가장 어릴 적의 추억들은 모두 제 외할머니와 함께한 외가에서의 기억들로 가득합니다.
제가 네 살 딸아이를 키우면서 최근에 외할머니 생각이 참 많이 났었어요. '내가 이만할 때 외할머니가 나를 키워주셨구나.' 아이가 목소리가 꽤 우렁찬 편인데 그런 목소리도 할머니 젊으셨을 때 목소리와 참 많이 닮았어요. 노래와 춤도 좋아하는 우리 딸 아이를 보면서 젊은 시적 할머니를 많이 떠올립니다.
할머니는 늘 음식을 한상 가득 준비하셨어요. 하루에 세끼, 그 사이사이로 당시 대학생이던 삼촌, 이모들이 오갈 때면 또 할머니는 식사를 차리시고... 하루에 열번도 넘게 상을 차리셨던 것 같아요.
어릴 적 제 어렴풋한 기억에 할머니 부엌에는 제 키만했던 냄비에 늘 맛있는 대구식 소고기국이 가득차있었고요, 부추전, 생선, 김치등을 비롯한 맛있는 반찬들로 한상 가득 푸짐한 상을 준비하셨었어요.
동짓날이 되면 할머니와 새알을 빚어 팥죽을 쑤고, 설날 다가오기 전에는 쌀을 한 다라이 가득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을 뽑아 오기도 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산, 절에도 많이 놀러갔었고, 할머니가 시키는 심부름을 하러 동네 장에도 많이 다녔어요.
그랬던 외할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세요. 소식을 듣고 잠시 한국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뵈었던 때가 제가 둘째 임신하고 첫째가 기저귀 차고 있을 때였네요. 제 일상이 바쁘다는 핑게로, 멀리 산다는 핑게로, 시차가 있다는 핑게로 연락도 자주 드리지 못하고 지내왔네요. 그래서 남편에게 한국을 짧게라도 혼자 다녀왔으면 한다 했더니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다음 날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갔고,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타고 외가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반가움에 눈물을 흘리셨고, 저와 함께 간 엄마께 "OO야, 네가 오니 든든하다."하셨습니다. 어쩜 제 한국 방문에 엄마도 든든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가있는 동안은 할머니께서 식사도 잘 하시고 말씀도 잘 하시고 해서 얼마나 다행이고 기뻤는지 몰라요.
늘 정성들여 할머니께서 차려주신 그 음식이 전 떠오르고, 할머니는 제게도 "(가족들) 좋은 것 잘 해먹이래이" 하셨습니다. 할머니와 엄마와 저, 나란히 3대가 누워 잠도 자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떠날 때 저를 보시며, "편지 쓰래이. 내가 이제 니를 또 볼란가..."하시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또 언젠가는 죽어 자연으로, 하늘로 돌아가죠. 이것이 세상 이치임을 알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늘 그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떠난다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아직도 저를 부르시는 할머니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젊은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말이죠.
할머니가 보고싶네요. 제게 너무 아름다운 추억 만들어 주시고 무한 사랑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어릴 적 네살까지 외할머니께서 키워주셨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부모님을 뵈었다고는 하지만 제 머릿 속에 남아있는 가장 어릴 적의 추억들은 모두 제 외할머니와 함께한 외가에서의 기억들로 가득합니다.
제가 네 살 딸아이를 키우면서 최근에 외할머니 생각이 참 많이 났었어요. '내가 이만할 때 외할머니가 나를 키워주셨구나.' 아이가 목소리가 꽤 우렁찬 편인데 그런 목소리도 할머니 젊으셨을 때 목소리와 참 많이 닮았어요. 노래와 춤도 좋아하는 우리 딸 아이를 보면서 젊은 시적 할머니를 많이 떠올립니다.
할머니는 늘 음식을 한상 가득 준비하셨어요. 하루에 세끼, 그 사이사이로 당시 대학생이던 삼촌, 이모들이 오갈 때면 또 할머니는 식사를 차리시고... 하루에 열번도 넘게 상을 차리셨던 것 같아요.
어릴 적 제 어렴풋한 기억에 할머니 부엌에는 제 키만했던 냄비에 늘 맛있는 대구식 소고기국이 가득차있었고요, 부추전, 생선, 김치등을 비롯한 맛있는 반찬들로 한상 가득 푸짐한 상을 준비하셨었어요.
동짓날이 되면 할머니와 새알을 빚어 팥죽을 쑤고, 설날 다가오기 전에는 쌀을 한 다라이 가득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을 뽑아 오기도 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산, 절에도 많이 놀러갔었고, 할머니가 시키는 심부름을 하러 동네 장에도 많이 다녔어요.
그랬던 외할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세요. 소식을 듣고 잠시 한국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뵈었던 때가 제가 둘째 임신하고 첫째가 기저귀 차고 있을 때였네요. 제 일상이 바쁘다는 핑게로, 멀리 산다는 핑게로, 시차가 있다는 핑게로 연락도 자주 드리지 못하고 지내왔네요. 그래서 남편에게 한국을 짧게라도 혼자 다녀왔으면 한다 했더니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다음 날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갔고,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타고 외가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반가움에 눈물을 흘리셨고, 저와 함께 간 엄마께 "OO야, 네가 오니 든든하다."하셨습니다. 어쩜 제 한국 방문에 엄마도 든든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가있는 동안은 할머니께서 식사도 잘 하시고 말씀도 잘 하시고 해서 얼마나 다행이고 기뻤는지 몰라요.
늘 정성들여 할머니께서 차려주신 그 음식이 전 떠오르고, 할머니는 제게도 "(가족들) 좋은 것 잘 해먹이래이" 하셨습니다. 할머니와 엄마와 저, 나란히 3대가 누워 잠도 자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떠날 때 저를 보시며, "편지 쓰래이. 내가 이제 니를 또 볼란가..."하시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또 언젠가는 죽어 자연으로, 하늘로 돌아가죠. 이것이 세상 이치임을 알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늘 그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떠난다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아직도 저를 부르시는 할머니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젊은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말이죠.
할머니가 보고싶네요. 제게 너무 아름다운 추억 만들어 주시고 무한 사랑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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